미로의 숲, ‘친구’를 찾아서

아뜰리에에르메스,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개인전
2026 / 01 / 01

스페인 설치미술가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Daniel Steegmann Mangrané). 그는 자연과 인공,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가 사라진 21세기 아르카디아를 꿈꾼다. 흙, 바위, 식물, 산업 재료 등이 뒤얽힌 장소특정적 미술로 인간 중심주의를 전복해 왔다. 그가 한국 첫 개인전 <산과 친구되기>(2025. 11. 28~3. 8 아뜰리에에르메스)를 열었다. 가벽과 커튼으로 공간을 나누고, 곳곳에 자연물을 배치해 전시장을 ‘숲의 미로’로 탈바꿈했다.

<번개치는 정원> 한국 소나무, 화산석, LED 전구 가변크기 2025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재단

―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당신은 전시 공간 자체를 재료로 삼는 장소특정적 설치를 선보여 왔다. 이번 아뜰리에에르메스는 당신에게 어떤 재료였나?
DSM 한국과의 인연은 2016년 아라리오뮤지엄 그룹전 <텍스트가 조각난 곳>에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작년 5월에는 <맑고 투명하고 깨어있는>(아트선재센터)전에 작품을 선보였다. 그 전시를 계기로 여러 기관과 스튜디오를 방문했고, 다양한 큐레이터와 아티스트를 만났다. 한국 미술씬은 예나 지금이나 역동적인 공간이다. 이런 나라에서 전시를 열게 돼 기쁘다. 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늘 전시 공간을 직접 탐방한다. 이번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는 특히 중정에 시선이 꽂혔다. 마치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캡슐’처럼 느껴졌달까…. 이곳을 자연으로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인공적인, ‘혼성의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모순이 현실에서 어떤 긴장을 만들어낼지 궁금했다. 전시란 익숙한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 도구다. 중요한 건 관람객이 전시장을 나선 이후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다.

― 매번 현지에서 재료를 조달해 사용한다. 이번엔 한국 소나무와 돌에 주목했다. 당신이 바라본 한국의 자연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자연물을 수집할 때 기준이 있다면?
DSM 한국은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가 일상 깊숙이 스며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마다 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풍수와 같은 전통적 사고를 여전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나는 자연물을 ‘재료’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수집하거나 소유하려는 태도와도 거리를 둔다. 자연은 살아있고, 이미 저마다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작품이 사물과 인간을 잇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예술은 상상으로 현실을 초월한다”

― 커튼과 파티션으로 공간을 나누되, 폐쇄하지 않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관람객은 ‘숲의 미로’를 헤매고 탐험하면서 일방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DSM 관람객의 시간과 주의를 붙잡는 것이 중요했다. 오늘날 전시는 너무 빠르게 소비되곤 한다. 관람객이 전시장을 거닐면서 자신의 몸과 움직임, 지각을 돌아보길 바랐다. 이런 점에서 전시장에서 느끼는 ‘혼란’은 감상자의 감각을 깨우는 장치다. 길을 잃고, 찾는 과정 자체가 세계를 비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이 된다. 서구 모더니즘은 관람객과 작품을 분리하고 화이트 큐브를 ‘중립적 공간’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나는 그 혼성을 내세우고 싶었다.

<홀로그램(싹트는 손)> 펄스 홀로그램 25×20cm 2021 Photo © Aurélien Mole

― 영상작품 <물고기와 입 맞추는 달>(2025)은 달과 물, 물고기 등 한 장소에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이 만나는 장면을 담았다. 한국 고전문학에서 달이 상징하는 ‘그리움’을 떠올리게 한다.
DSM 이 작품은 경주 월지에서 느꼈던 감정을 형상화했다. 나는 그곳에서 한참을 달빛에 빠져있었다.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건 아니지만, 상실감 같은 분위기를 전달받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제목부터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예술은 종종 그런 불가능성에서 출발한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초월하지 않나.

― 당신의 작업 전반에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영향이 엿보인다. 신유물론의 핵심은 자연과 기술, 주체와 객체의 위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 담론을 어떻게 작업에 반영하는가? 또 자연을 향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
DSM 어릴 적에는 생물학자를 꿈꿨다. 자연을 좋아했고 생물학, 건축, 예술에도 관심이 있었다. 성장하면서 계산적인 과학보다는 자유로운 예술이 내게 잘맞다는 걸 깨달았다. 예술의 장점은 내가 사랑하는 모든 테마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철학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주장하듯 ‘행위’는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비인간 모두가 주체다. 나 역시 사물이나 기술에 도움을 받아왔다. <번개치는 돌>(2025) 연작에선 돌과 LED 조명을 병치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드러냈다. LED 조명은 테크놀로지의 산물이지만 몇십 년 후에는 오히려 돌이 더 현대적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돌의 외형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은 끊임없이 갱신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과 기술은 분리될 수 없는 협업자다.

―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DSM 오늘날 우리는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술은 그 감각을 유지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내 작업을 본 사람들이 자연을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 1977년 바르셀로나 출생. 바르셀로나 EINA디자인예술대 학사 졸업. 에스더쉬퍼 파리(2024), 가나자와 케이지반(2024) 등에서 개인전 개최. 바르셀로나에서 거주 활동.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재단